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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목사 김신근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 더불어 살아갈 인간교육
  • 자기 삶의 주체가 되며 양심에 따라 사는 인격교육
  •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교육

김 신 근(金信謹) 원로목사님

- 사회와 교회를 잇는 교육 선교의 헌신자 -

김신근 목사는 기독교 지도자로서, 교육자로서, 사회사업가로서,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에 고난을 당했던 처절한 민중의 대표자로서 신변의 안위를 생각지 아니하고 총탄 앞에서도 당당히 맞서 시민의 생명을 구해내는 위대한 지도자로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그의 정열을 송두리째 다 쏟아부은 삶을 살았던 분이다.

어린 시절엔 꿈이 큰 소년으로 성장하여 청년이 되면서 참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사실 뭐든지 하려고 들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에 세상이 만만한 것도 이 때 뿐이다. 젊음이 방패막이가 되어 주던 시절이 지나고 나면 대개 사람들은 세상을 탓하며 다들 비슷해져 간다. 자기의 주장을 부르짖던 목소리는 점점 움츠러들고 이해, 포용, 양보, 성숙이란 말들로 타협과 포기와 비겁함, 무능력을 위장하고 싶어 한다. 칠팔십 년을 살았을 때 자신의 살아온 삶의 여정을 돌이켜 봄에 꽉 여물어 터진 석류 알맹이처럼 알차게 살아왔노라고 자기의 소신을 관철시키며 한 평생을 살아온 사람, 그에게는 82년의 세월이 그저 일개인의 생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요, 사회와 역사의 발전에까지 그 몫을 톡톡히 해낸 보람된 인생행로일 것이다. 시대가 험난해도, 환경이 불우했어도 자신의 외적 조건들을 뛰어넘어서 의를 위해서 꿋꿋이 싸우며 살아 나온 사람의 생은 애써 그 지난날의 조각들을 주워 모으지 않아도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빛을 발하는 것이다.

김신근 목사는 나라와 민족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일평생 교육에의 집념으로 불사른 분으로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 부모 공경을 가르치고 실천에 옮기도록 교육시킨 목회자였다.

1. 출생과 성장

국제적으로는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암울하던 시기였고, 국가적으로는 일본이 대한 제국을 식민지로 강제 합병시킨 지 5년째가 되는 1914년 5월 9일, 김신근 목사는 가장 낙후된 농어촌인 전남 신안군 암태면 도창리 농가에서 부친 김학태 씨와 모친 김복순 여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학창시절의 이야기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랬듯이 그의 어린 시절은 암울하기만 했다. 특히 암태란 곳이 바로 소작쟁의가 일어났던 곳이었던 까닭에 그는 지주측 사람들하고 소작인들이 싸우고 마구 난장판이 되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자랐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눈에도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소작료를 너무 많이 받아내는 것같이 보였다. 어렴풋이나마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압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린 시절을 지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하고는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못했던 소년 김신근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당돌하게도 주재소를 찾아갔다. 일본에 건너가기가 쉽지 않았던 때였으나 어렸을 적부터 남달리 배짱이 두둑했던 그에게는 그것도 간단한 일이었다. 주재소의 허락으로 여행권을 넘겨받아 쉽게 일본에 갈 수가 있었다. 다행히 일본에 외삼촌이 살고 있어서 그 곳에서 신세를 지며 3년 동안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신학 이전의 신앙생활, 신앙입문의 동기 및 신앙활동에 대하여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던 그는 18세 되던 해 처음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같은 고향 출신 여성으로 한국전쟁 때 순교 당한 문준경 전도사로부터다. 그녀는 여자였지만 굉장히 활동적이고 말도 잘하여 전도를 열심히 하던 때였다. 신안군 도서지방의 여러 섬에 그녀의 전도로 말미암아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청년 김신근이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서울신학교는 25세가 되어야 학생의 자격을 주었기 때문에 25세가 될 때까지 목포에 나가 장사도 해보고, 건축사업도 해보곤 했는데 그 때부터 스스로 환경을 만들어 나가며 자신의 앞길을 주도적으로 개척해나가는 그의 기질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2. 목회 사역(교회 개척과 재건, 그리고 확장)
첫 목회지(금산교회) 이야기 ~ 1943년

1942년 2월에 경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금산교회에 부임하였다. 항일 강연과 신사참배 거부로 금산경찰서에 수감되어 40일간 옥고를 겪는 중, 심한 취조와 이질로 고생하여 졸도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해산된 금산교회를 재건한 후 무교회인 북교동교회 재건과 사역에 동참했다.
광주제일교회는 1946년 1월에 재건하고 그 해 4월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66년까지 21년간 사역하였다.
광주제일교회에 시무할 때 무등산기도원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한 후 하산할 때 아직도 힘이 남아 있어 단숨에 뛰어 내려왔다는 일화가 있다.

학동교회 개척과 건축 사역

1967년 ~ 1984년까지 학동교회를 설립하고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동안 자비량 전도자로서 교회건축 시 많은 액수를 헌금하여 헌신적으로 목회하면서 지방 내 여러 교회들이 개척될 때 직간접으로 개척을 도왔다(광주제일, 신광, 광주중앙, 주월, 담양, 가산, 신의 도포, 광주(베드로), 삼향, 시종, 밀알, 숭의교회 등). 특별히 예배당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목회자와 성도들이 애국하는 마음으로 항상 국가관이 투철함을 볼 수 있었다.
1984년 11월 27일에는 학동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받았다.

교회와 교계의 주요활동

1942년 서울신학대학교 졸업
1943년 4월 1일 목사안수, 항일강연과 신사참여 거부로 옥고를 치룸
1946년 1월 광주제일교회를 재건하고 학동교회 외 10여 교회를 개척
1952년 숭의학사 설립
1958년 세계기독교봉사회 전남대표 역임
1955~1958년 세계기독교선명회 전라남도대표 및 전국연합회장 역임
1959년 5월 9일 숭의중학교 및 숭의과학기술고등학교를 설립
1967년 학동교회를 설립 1984년까지 담임목사로 시무
1968~1984년 서울신학대학교 이사 및 기성회장 역임
1972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제27회) 역임
1973년 아시아지역 성결교회연맹 회장 역임
1974년 왕인박사현창협회 이사장 역임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사태수습위원장 직무수행
1984년 11월 27일 학동교회 원로목사 추대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다

1986년 11월 27일에 그는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숭의학원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미국의 라번대학교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에게 학위를 수여한 것이다.

목회사역 중에 1977년 11월 13일(주일)의 주일예배 설교[마태복음 7:24-27,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선 나라] 중 일부를 발췌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집은 주초를 반석 위에 놓아야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쉽게 무너집니다. 뉴욕에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102 층의 마천루인데 오랜 세월 든든히 서 있는 것은 그 집이 견고한 기초 위에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의 생활을 반석 위에 지은 집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반석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그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나라(국가)도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야 합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오직 하나님의 장중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지켜 주셔야 나라가 보전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다.” (시 33:12)고 했습니다.

미국 방문 시 미국의 청소년 범죄가 많은 것을 목격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우리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미국에는 보고 배울 것이 없으니 미국에 유학 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그 다음에 총회장이 되어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시카고에 들렀을 때 술과 담배의 판금 구역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또 어느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몇몇 미국인 신자들이 자기 아들을 선교사로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에 가졌던 미국에 대한 나의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치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청소년 범죄가 극성함에도 불구하고 망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를 움직이는 나라가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미국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나라입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할 때 기도로 시작했답니다. 미국교회는 교회 에 십자가와 성조기를 게양합니다. 국가란 토지나 정부보다도 국민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한 조상들의 청교도 정신과 국민들의 기독교 신앙이 오늘의 미국을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진 나라는 튼튼해서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온 국민의 투철한 애국정신과 기독교 신앙 위에 나라가 설 때 견고하여 무너지지도 않고 길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아멘)

3. 육영사업 - 기독교교육의 산 요람 숭의학원 설립

전쟁 중인 1952년, 농촌 구석에 쳐박혀 자신의 환경을 탓하며 나라의 불안정을 원망하면서 고민만 하고 있던 그가 아니었기에 그의 시각의 초점은 앞으로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에게로 꽂혔다. 그들(젊은이)이 바로 서야 나라와 민족이 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가난하고 배울 길이 없던 차에 그 당시 공산당이 학생들을 매수하려 들자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채 많은 젊은이들이 거기에 물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숭의학원 설립과 성장과 발전과정

해방과 한국전쟁 후에 숭의학사를 세워 전쟁고아 및 불우한 청소년을 양육하다가 이들이 장차 공산주의 사상의 위험 속에 빠지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일할 유능한 인물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아들에게 건전한 정신교육과 기술교육을 잘 시켜서 사회에 내보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또 앞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면 실업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믿고, 그 후 30여 년간 줄곧 열악한 교육환경에서도 끝내 인문계 고등학교로 개편하지 않고 실업교육으로 일관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아직 우리나라에는 실업학교가 없었다.

김신근 목사는 직접 문교부 담당자를 찾아가 우리나라 실정에는 이제 실업교육이 절대 필요하다고 역설하여 이를 계기로 비로소 우리나라에 실업고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곧 우리나라의 실업학교 설립의 선구자인 셈이다.

그는 1960년부터 5회에 걸쳐 미국 및 독일, 이스라엘, 덴마크, 일본 등 세계를 일주하며 각국의 기독교교육과 실업교육의 실태를 돌아보고 시찰, 견학 중에 숭의학원의 청사진을 그리면서 학교를 발전시켜 나갔다.

1인 1기 교육을 통하여 학교에서는 기술교육을 시켜서 국가의 산업화에 대비한 일군을 양성시키고, 아울러 사회적으로는 피폐해가는 농업을 향상시키는 영농교육과 농장을 운영함으로써 대량생산을 꾀하여 국가의 균형발전을 이루는 일에 미래의 안목으로 교육에 임하였다.

김신근 목사는 1959년 5월 9일에 숭의중학교 및 숭의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초대교장으로 8년간 봉직하면서부터 한국의 사회복지사업과 사학 육성에 끼친 그의 공로는 실로 지대하다. 학교 설립 당시부터 굳건한 믿음, 뜨거운 사랑, 꾸준한 노력이라는 설립자의 세 가지 학교 교훈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1966년부터 1980년까지 어려운 시절에 젊음과 황금기의 생을 다 바쳐 숭의학원 이사장직을 수행하면서 학교의 기틀을 든든히 다져나갔다. 특히 학교에 조경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무궁화를 많이 심어 교정에 무궁화꽃이 만발하게 된 것을 보면 설립자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1972년도에는 신의여자중학교를, 1974년에는 신의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설립자의 의도대로 숭의학원(숭의중학교, 숭신공업고등학교)은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사랑과 봉사로 실업교육을 건전 육성하여 우리나라의 경제 내지는 우리 자신의 경제생활 향상을 위하여 기여하도록 건립되었다. 그동안 학교를 운영해 오면서 관선이사가 들어오는 등 우여곡절의 어려운 일들도 있었다.
그러나 박종택 이사장이 취임한 이래 숭의학원은 괄목할만하게 발전했다. 학교환경을 개선하여 학생들은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고 시민들도 즐겨 찾는 휴식공간이 되었다. 아울러 체육관이 완공되어(2001년 5월) 고등학교로는 최대규모의 체육관을 갖게 되었으며, 남녀공학이 실시되어 면학분위기가 좋아졌으며, 학생들이 학업에 충실하고 있다.

특히 교내에 종교부가 있어서 학생신앙교육의 일환으로 매일 경건회와 성경과목을 통해 학생들의 경건 훈련을 시키고 있으며, 각 학급에 종교부장 제도를 두었고, 부활절과 추수감사절의 절기 예배는 물론 입학식과 졸업식 및 각종 교내 행사를 진행할 때 예배로 시작함으로써 학교 설립자의 기독교 정신을 계속 확산시켜 나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임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한 김화자(김신근 목사의 장녀) 권사도 학교의 제도와 조직 및 모든 운영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사명을 감당한다고 했다.

숭의학원을 통해 사회 각계각층에 훌륭한 일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동문 중에 양석승(전 신한은행 상무이사), 김광진(전 행정자치부 지방예산 담당 국장), 문경호(전 전남지방 경찰청장), 양길승(전 청화대 제1부속실장), 오세민 장군(준장 예편), 최양환 장군(전 소장, 3군사령부), 윤재갑 제독(전 해군 소장), 봉태열(전 서울지방국세청장) 등은 숭의학원의 자랑이기도 하다.

아래 글은 숭신공업고등학교 1974년도 교지에 실린 이사장 김신근 목사의 “참사람이 되려고 배운다.”에서 발췌하였다.
사람은 참사람과 사람답지 못한 사람, 두 종류가 있다. 사람답지 못한 사람은 자기와 이웃을 위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범인(凡人)은 생이지이(生而知之)하는 것이 아니므로 모름지기 교육을 통해서만 참사람이 되어진다. 일찍이 위고는 “학교를 여는 자는 감옥을 닫는다.”라고 했다. 그만큼 교육이란 참사람을 만들어내는 힘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과연 교육은 사람에게 세상의 길을 알게 하고, 덕을 구하게 하며, 능력을 길러주고, 가르침을 따라 유익하게 살도록 해 준다. 인간은 배움으로써 행위를 올바르게 할 수 있다.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道)를 모른다.

첫째, 참사람이란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의 효도관은 자녀들이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며, 효도란 자수의 보상이 약속된 첫 계명으로 주시되는 최고의 도덕이고 효도는 또한 백행(百行)의 본이 된다. 부모가 생존해 계실 때 존경하는 마음으로 공경해야 할 것이다.
둘째, 참사람이란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난 뒤에 내 몸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생명보다도 국가의 이익을 더 앞세워야 한다. 미국에 유학 중인 이스라엘 학생들은 자기 나라에 전쟁이 나면 서둘러 귀국한다고 한다.
‘간디’는 말하기를 “애국심은 인류애와 동일하다.”라고 했다. 자기 나라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세계인류를 사랑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셋째, 참사람은 이웃에 봉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다. 즉 이웃에 봉사하라는 말씀이다. 봉사는 인간 최고의 도덕이요 의무이며 가장 뜻이 있고 목적 있는 행동이다. 또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은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이와 같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이웃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참사람이다. 사람은 교육을 통해서 이런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참사람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배우는 숭의학교 학생들이 되자.
4. 사회사업 - 농촌복지와 복음화 운동
농장간척사업

1962년 전남 신안군 압해면 분매리 지선에 간척지 149정보를 매립 조성하고 염전과 농지를 축조하여 연장 고아 정착장을 설립했다.
1964년 전남 영암군 도포면 덕화리 지선에 간척지 680정보를 매립 조성하여 숭의실업고등학교의 실습농장으로 축조하였다. 도포에 농장을 조성할 때에는 당시에 구하기 어려운 트랙터를 평택에 있는 농기구 수입책이며, 농장을 운영하는 친구의 알선을 통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보급을 받아오기도 했다.
또한 비육우 460두를 미국으로부터 무상지원 받아 도포에 우사(牛舍)를 직접 지어 농촌 소득 향상에 기여하기도 했다.

농장이 조성된 곳에는 반드시 교회를 세워 숭의교회(전남 신안군 압해면 분매리: 이명석 전도사)와 도포교회(전남 영암군 도포면 원항리: 최경훈 목사)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며 성장하였다.

5. 그의 말년과 소천

김 목사는 의협심이 강하고 선교자적 소명감에다 굽힐 줄 모르는 구국애의 열정에 불타던 시절 기독교대한성결교회가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강제 해산되면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독립촉성회와 대동청년단, 구국연맹 등의 일선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자신만이 아닌 남을 위한, 나아가 사회와 나라를 위한 사랑을 실천하기도 했다.
광복 전후 청년기의 항일, 반공 운동을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사회사업, 육영사업, 목양 성역에 투신하여 헌신적인 노력으로 많은 업적을 쌓았으며 항상 부모에 대한 효도와 나라 사랑과 하나님 공경을 외치면서 투철한 신념과 불굴의 의지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사시다가, 마침내 1996년 6월 4일에 성역 52년을 마치고, 82세의 일기로 노환 소천하셔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평소의 목회 생활 중에는 엄격하게 자녀들을 교육시켰고, 가정보다는 교회,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나 불행한 이웃을 위하여 구제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쏟았으며, 사후에 처자식들에게 물려 줄 유산도 없이 몽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였으며, 정원에 마지막 남은 나무 한 그루마저 숭의학교의 조경을 위하여 가져갈 만큼 학교에 애틋한 사랑을 심었다. 60년대 후반 미국으로부터 받은 구호물자를 최대한 많이 보급받아 숭의학사 뿐 아니라 학동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나눠주면서 보람을 느끼기도 하셨다.

유족으로는 부인 주신금 권사와 아들 화민, 화석, 화실, 딸 화자, 화심을 두었으며, 많은 손자와 손녀 등 후손들을 두셨다.

6. 내조자 주신금 권사의 헌신

주신금 권사는 1912년 10월 3일 신안군 팔금면 읍리 농가에서 부친 주경주씨와 모친 김영진씨의 차녀로 출생하였고, 1930년에 김신근 목사와 결혼하였으며, 도창성결교회에서 학습 및 세례를 받았다. 부군의 목회지인 금산, 북교동 및 광주제일교회를 재건하고, 학동교회를 설립하여 시무하다 원로로 추대될 때까지 42년간 목회자의 어진 내조자로서, 교회에 믿음의 어머니로서 일향 귀감이 되는 족적을 남겼다.

특히 1943년 항일 강연과 신사참배 거부로 금산경찰서에 수감된 부군의 옥바라지를 할 때나 해방 후 부군을 도와 숭의학사를 세워 빈한한 청소년들을 선도할 때나, 부군이 학교법인 숭의학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한 이래 재단이 어려움을 겪을 때나, 부군의 사역 초기의 간초한 시절과 한국전쟁 등 어려운 고비마다 피나는 노력으로 부군을 묵묵히 내조하며 본분을 다하였고, 1995년 학동교회의 권사로 취임받고, 2002년 명예권사로 추대를 받았다.
2003년 1월 6일 노환으로 향년 92세의 일기로 소천할 때까지 불철주야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염려하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따님 김화자 권사의 증언에 따르면 어머니 생전에 평생을 통하여 육신적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헌신적이었으며 항상 신앙 중심적이었고 말없이 눈물로 고생하신 분이었다고 말한다. 영결 예식 때 임형섭 집사는 주신금 권사의 소천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조시(弔時)를 남겼다.

/ 나그네 되어/ 걸어왔던 가시밭/ 못 내/ 아쉬움과 그리움을/ 떨구지 못한 채
/ 마지막 눈물로 애처로이/ 눈시울을 적시었네/
/ 되돌아보니/ 이 세상에서 만나셨던/ 임에 향한 그 사무침은/ 새날 아침/ 잠에서 깨어 어둠을 가르고/ 아득하기만 하였는데
/ 어느새/ 삶의 저편에서/ 아름다운 향기로/ 그윽히 풍겨나고 있네/
/ 역사의 소용돌이에 밀린/ 가난하고 불우했던 청소년의 미래를/
희망과 꿈으로 가꾸어 나간/ 교육의 터/ 숭의학원에 땀과 피로 젊음을 바쳤던/
남편에 대한 내조가/ 고요함 속에/ 길이길이 아름다움으로 뻗어나고 있네/
한 웅큼 또 한 웅큼/ 정성어렸던 콩나물들/ 그 많은 애틋한 애환이 이야기되어/
학동교회 설립에 반석이 되었고/ 생명의 말씀으로/ 목마른 자 편히 쉬어가라 먹이시네
방황하다 지치고 쓰러질 때/ 사랑의 길로 인도하시네/
/ 조심스레 그 어디에서/ 들려온 흐느낌은/ 분명 당신의 이별을/
그토록 아픈 슬픔이라 하네/
/ 이제는/ 험한 세상 고달픈 곳/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떠나시려 하네/
눈물과 슬픔도 없는 곳/ 영원한 집/ 본향으로 가시려 하네/

7. 믿음의 유산(공적)

2000년 6월 10일에 전남 영암군 도포면 원항리 고인의 묘소에서는 청산의 제5주기 추모예배 겸 송덕비 건립 제막행사가 있었다. 청산 김신근 목사 송덕비 건립 추진위원회(위원장 임용주)에서 주관한 이 행사는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 일생을 몸 바쳐 오신 분으로서 그의 생애가 너무도 감동적이고 신앙적이며 성실함을 통한 역동적인 삶이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평소 그 분을 존경하고 흠모하던 목회자와 평신도, 숭의학교 교직원, 그리고 제자들과 후학들이 청산 김신근 목사 송덕비 건립을 추진해 왔는 바 소천 5주기에 그 분의 뜻과 정신을 길이 새기고, 목사님의 교훈적인 삶을 널리 선창하고 추념하고자 삼가 이 비를 세운다.”라고 밝히고 있다.

청산 김신근 목사 송덕비문

여호와 우리 주여 당신을 송축하니
하늘엔 영광이요 땅엔 축복이라
성령이 주의 종을 택하사 이 땅에 보내심은
당신의 뜻하심을 역사함일지
주님의 종으로 일생동안 충성했던
자랑스런 아들이 여기에 쉬옵니다
김신근 목사님 당신이 걸어오신
형극의 그 길이 존귀와 영화와는
멀고도 달랐기에 숭고한 그 정신
고귀한 그 마음을 소리높여 노래하네
선창자가 칭송하네 하나님의 종 되옴을
서울신학교 성경공부 목사안수
금산성결교회 시무목사 우렁찼네
목포 북교동성결교회, 광주제일성결교회,
학동성결교회, 성결교단 총회장
세우고 키우고 재건하여 부흥하여
민족의 아들에서 인류의 아들되었네
뒤이어 노래하네 풍전등화 조국운명
온몸으로 항일하고 격리수감 불굴정신
타오르던 광복횃불 온누리를 비추시고
피비린내 동족상잔 세상천지 전쟁고아
끌어안고 어루만져 숭의학원 이루시고
심신교육 기술보국 국가발전 선봉됐네
가난설움 어린양들 간척사업 벌이시고
등따시고 배불러야 복음말씀 들린다고
숭의학교 신의학교 교육터전 닦으시고
화목하라, 사랑하라, 공경하라
그 유훈 뜨거운 말씀들이
물살 환히 살아오네
왕인박사 현창사업 우리문화 뿌리찾기
일본사람 깨우친 뜻 길이길이 되새기리
민중항쟁 자유쟁취 광주시민 민주실현
당신의 어깨에서 환하게 꽃피웠지
아! 장하고도 크셔라 님의 발자국
청사에 길이 빛날 우리의 영원한 목자여!
모두들 노래한다 님의 영생을
교회에서 학교에서 이어지는 칭송소리
조국에서 세계로 퍼지는 노래소리
이 땅에서 천국으로 전해지는 찬송소리
당신이 뿌린 씨앗 싹트고 영글어
수수만년 이어지고 자손만대 양식되리
만백성의 소망언약 당신세워 이루시고
하늘나라 영광으로 이방인이 빛되셨네
성부의 뜻이 있어 하늘나라 들라시니
팔십이세 주님사업 천국으로 옮기고자
주신금 사모님 화지화민 화석화실
화자화심 남기시고 하늘나라 가셨다네
여기남아 부른 노래 천국으로 영원으로
길이길이 이어지리 영광으로 축복으로
당신을 향한 노래 가슴에서 울리리라
영광 또 영광
주님의 품 안에서 편히 고이 살으소서

한편 고인의 5주기 추모예식에서 청청 정성채 시인이 낭송한 추모시를
여기서 소개한다.

그 이름 빛나리 청산이여

1914년 5월 9일 대지의 어둠을 가르고
하늘의 영광
그 찬란한 빛 비취니
태초에 우렁찬 울음
그 찰나에 태어난 님

하늘의 엄숙한 소리
그 님께 울리었네
“너의 오른손에 선지자의 지팡이를 받아라
그리고 저 세상으로 걸어 나아가거라
너의 길 잃은 양들의 양치기
하나님을 증거하며 빛을 밝히어라”
님은 그렇게 우리 곁에 다가오셨네

님이 오신 그 세월
조국은 태양을 잃고
민족은 풀잎처럼 누워있었네
거리는 기모노 옷자락이 펄럭이며
백성의 웃음을 빼앗았고
게다 소리는 우리 주권을 짖밟았네

님은 부단히 일어섰네
심장은 젊은 피는 사자후(獅子吼)하며
조국광복을 위해 횃불을 들고
그 젊은 피 다 바쳤네
님의 거룩한 혼(魂)불
이 땅에 광복을 찾고
환희에 찬 나팔소리 높이신 님
주님의 거룩한 목자
하나님께 영광 드리었네

6.25 동족상잔
금수강산 폐허되고
동서남북 방향 잃고
어미 잃은 어린양들
허허로운 벌판 헤매일 때
님은 선지자의 지팡이로
긍휼한 생명들을
그 가슴에 품어 들였네

솔로몬의 지혜 간구하여
어린양들 영혼을 살찌우고
꿈을 심고 소망을 키웠네
님이여! 들으시나이까?
그 혼 다 바친 숭의(崇義) 상아탑
이 나라 동량(棟樑)들의 힘찬 함성소리를
믿음, 소망, 사랑으로 뭉친 수만 건아들
이 땅 위에 님의 거룩한 뜻 전하니
조국은 세계로 미래로 줄기차게 뻗어 나아가리

님이여!
우리 모두 거룩한 그 넋 기리며
그 곁에 서 있으니
님이여 편히 잠드소서
주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소서
장하신 님의 뜻
우리 모두 영원히 찬송하리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포상

1957년 불우고아육영사업 공로 표창(사회복지연합회)
1958년 한국사회복지사업 공로 표창(사회복지연합회)
1962년 대통령 공익 포상
1972년 교육공로 표창(기독교교육협회)
1973년 사학육성 공로상(한국사학재단연합회)

8. 나가는 말

김신근 목사는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과 목회사역을 그의 강직한 성격대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평생을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살면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가정은 돌보지 않으면서도 철저하게 사회의 공동 유익과 특히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나라 사랑과 부모공경을 헌신적으로 외치며 호남 성결인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생을 살다가 값진 유산들을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기고 떠난 분이다.

농촌의 복지향상을 위하여 투자했던 자신의 애환이 서린 영암군 도포면 원항리의 농장이 바라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그가 묻혔고, 숭의학원은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웅비의 상아탑으로 성장해 가면서 후학들이 설립자의 뜻을 받들어 계속 성장해 가고 있으며, 그의 목회지와 사역의 흔적들은 오늘날 부흥되는 교회의 생명체들로서 광주, 전남지역에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전초지기로서의 사명을 계속 감당해 나아가고 있다. (집필자 : 박성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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